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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원정리 봉수대는 봉화재, 또는 용수로 불리우며 조선시대 서남쪽 봉화의 주요 직봉을 이루었던 순천봉화와 연결을 가지며 서해안의 외적침입을 알리게 하는 등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해발 250m지점 산정에 설치되어 봉화수가 상주하며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 쌍봉산과 충남 당진군 면천면, 충남 아산군 인주면 신창봉화와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봉화재 정상에는 약 2m높이의 방형 석축으로 된 500평의 평지가 있으며 현재 석축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봉화대 북쪽 100m 아래에는 봉화수의 주거지와 샘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봉화재는 남양만 상단부에 위치하여 하단의 모양이 용이 누운것 같다하여 용수지 라고도 하며 전체 산맥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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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온장군 충신정문 이 정문은 조선 명종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때 전라도 장흥부사로 재직중 왜구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한온 장군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장군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 20세 때 과거에 올랐고, 38세때 장흥부사에 부임,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데 힘써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장흥 달량포에 왜선 70여척이 쳐들어오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숙종 22년(1696) 그의 충정을 기려 [충의]라는 시호를 내리고 충신정문을 세우게 했으며 사당안에 걸린 현판의 [鐵腸石膳一心殉國]"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은 오직 나라에 바쳤도다."라는 글을 두고두고 후세를 일깨우는 애국심과 순절의 교훈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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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군묘 및 사당 조선 세조 ~ 명종때 활약하던 수성군 최유림(1426~1471)장군의 사당이다. 최유림장군은 24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455년 좌익원종공신 3등이 되었으며, 1464년 중추원 부사, 1466년 전라도 처치사로 있었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 토벌에 참여한 공로로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 3등이 되었으며, 그 해 명나라의 북방을 침범한 이만주의 군대를 막기 위해 조선지원군의 출병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1468년 병조참판 수성군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1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내려와 타계하니 당시의 임금인 성종께서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안양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평택시 오좌동은 수성최씨 안양공파의 요람이 되었다. 사당은 500 여년 동안에 10여회 중수된 후 1982년 11월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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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각 충의각은 조선 중종 때 인물인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과 인조 때 인물인 추담 오달제(1609~1637)선생의 넋이 담겨 있는 유허지비를 보존하는 비각이다. 유허지비는 당시 진위유림에서 어릴 때 조광조 선생이 학문을 배우며 지냈던 곳이자 삼학사의 한분인 오달제선생의 옛집이 있던 곳에 비를 세울 수 있도록 나라에 소를 올려 허가를 득하여 1800년 세우게 된 연유를 지닌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중종 때 사림파의 거두로서 왕도정치를 주장하고, 사회개혁을 하는등 혁신적 정치를 꾀하다 실각한 분이며, 당시 진위 유림과의 교우가 두터워 경포산인 최수성, 오좌동의 개척자 최자반 선생들과 시론했다고 진위 현.읍지에 나올만큼 송탄에 그의 유지가 남아 있다.
추담 오달제 선생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의 거두로 순절한 삼학사의 한 분이며 현 동령마을에 옛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분으로 인하여 이충동이란 마을명이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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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리유적 조선시대 특수한 일에 종사하는 집단 내지 계층의 일시적인 숙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온돌유구이다. 방과 부엌의 구조로 방은 1~2평 규모로 비교적 작으며 부엌은 이보다 작아 2~4명이 거주한 침식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집의 방향은 바람의 영향에 따른 아궁이와 굴뚝의 방향을 고려 경사면에 서남향으로 하고 온돌의 골은 직선으로 배치한 후 두둑에 고임돌을 놓아 고래를 냄으로써 온돌의 열효율을 고려하여 축조하였다.
이 일대에서는 총 28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으나 집자리의 하부구조에 튼튼한 기초가 없고 가족생활이 불가능할만큼 면적이 협소하며 작업공간, 외양간, 공동우물터등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부대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장기적으로 거주하며 가족생활을 영위하던 곳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집자리에서 1678년이후 주조된 상평통보가 출토된것으로 보아 18세기 이후 축조된것으로 보이며 이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집자리의 구조와 성격을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한 3기를 이전해 보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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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재신숙주영정 및 감실주독 보한재 신숙주(1417~1475)는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으로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희현당,시호는 문충공, 본관은 고령이다. 세종을 비롯해 성종까지 6대 왕조에 걸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고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으로부터 음운에 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으며 뛰어난 문재와 학식으로 국조오례의, 동국정음, 세조실록 등을 찬수 했으며 저서로는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 등이 있다.
보한재 신숙주 영정은 1890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98cm, 세로 166cm로 공단화폭에 그린 좌안팔분면기좌상으로 보물 제 613호인 충북 청원군의 구봉영당본에 있는 진본을 이모한 것으로 안면묘사가 뛰어나다.
감실주독은 공의 신주를 모신 나무궤로 가로 30cm, 세로 45cm로 밤나무로 제작 되었으며 전면의 창호는 민살창으로 촘촘하게 짰으며,흑단과 주단으로 채색하여 외관이 미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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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군묘 및 사당 조선 세조 ~ 명종때 활약하던 수성군 최유림(1426~1471)장군의 사당이다. 최유림장군은 24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455년 좌익원종공신 3등이 되었으며, 1464년 중추원 부사, 1466년 전라도 처치사로 있었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 토벌에 참여한 공로로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 3등이 되었으며, 그 해 명나라의 북방을 침범한 이만주의 군대를 막기 위해 조선지원군의 출병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1468년 병조참판 수성군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1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내려와 타계하니 당시의 임금인 성종께서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안양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평택시 오좌동은 수성최씨 안양공파의 요람이 되었다. 사당은 500 여년 동안에 10여회 중수된 후 1982년 11월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